10월에 시작하는 대전 댄스학원 더소울댄스에서 함께하는 룸바 작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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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aina 작성일24-12-09 07:47 조회3회 댓글0건본문
#1795년 대전룸바 #부활 대축일에 #한국교회 #최초로 #미사를 #봉헌한 곳 출처 : 가회동 성당 홈페이지1779년 이벽을 중심으로 학자들이 천진암에 모여 서학을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서의 천주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를 더욱 깊이 알기 위하여 학자들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서 한국 교회 최초의 정식 세례자가 되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여러 학자들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함께 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호남의 사도라 불리던 유항검은 신자들 스스로 성사를 집행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북경의 주교에게 문의하기로 하였다. 1789년 윤유일이 북경에 파견되었고, 그 곳에서 평신도에 의한 성사 집전의 부당함을 깨닫고 돌아온다. 1790년 윤유일은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다시 북경의 주교에게 파견되었고, 이 요청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곧 신부의 파견을 약속하였고, 아울러 윤유일에게 미사경본 등의 성물을 들려 보내고 포도주 담그는 법 등을 알려주면서 성직자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였다.1791년 2월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가 조선으로 파견되어 변문에서 조선 신자들과 만나기로 하였으나, 신해박해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조선 교회에서 사람을 보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써 첫 사제의 영입은 무위로 끝난다. 조선 교회는 1793년 다시 윤유일과 지황을 북경에 보내 사제 파견을 거듭 요청하였고, 이에 주교는 학문과 인품을 갖추었고 조선 사람과 비슷한 풍모를 지닌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다.1794년 12월 23일 조선의 신자들을 만나 조선 땅을 밟은 주문모 신부는 1795년 1월 4일 한양에 도착하고,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마련한 북촌심처(北村深處) (가회동 관할 구역)에 있는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그로부터 언어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그곳에서 주문모 신부는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를 봉헌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 가회동은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가 집전된 장소요,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의 거점으로 한국 천주교 초기 신앙의 중심지였던 것이다.가회동 성당 외부 모습과 사랑방 가회동 성당 정문과 입구, 예수 성심 상가회동 성당 내부가회동 성당 감실, 성모상, 십자가1795년 6월 27일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바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고, 최인길은 사제의 복장을 하고 중국말을 하면서 포졸들을 맞아 주문모 신부 대신 체포된다. 그러나 곧바로 신부가 아님이 밝혀지면서 윤유일, 지황과 함께 포도청에서 곤장을 맞고 6월 28일 순교하였다. 1801년(신유박해) 순교할 때까지 주문모 신부는 북촌에 있던 강완숙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대전룸바 물론 그 사이에 주문모 신부는 전국을 순회하기도 하고, 박해를 피해 한 동안 한양을 떠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대부분의 기간 북촌에 머물면서 북촌의 석정보름 우물물로 세례를 베풀기도 하고,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등의 사목활동을 하였다. 석정보름 우물사진설명 : 20세기 초 서울에 상수도 시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 우물은 주된 음수(飮水), 생활용수 공급원이었으며 이곳 석정보름우물도 북촌 주민들의 중요한 음수원이었다. 석정보름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물 맛이 좋기로 소문났었으며, 이 우물물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인근 궁궐 궁녀들도 몰래 떠다 마시며 아이 낳기를 기원했다고 한다.1794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 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북촌심처 최인길(마티아)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기간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교 박해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갑자기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주문모 신부의 #첫 미사 #봉헌때 함께 했던 #복자윤유일 바오로 (출처 : 가회동 성당 홈페이지)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Paulus)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 야고보(尹有五, Jacobus)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 아가타(尹占惠, Agatha)와 윤운혜 루치아(尹雲惠, Lucia)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 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윤 바오로는,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1789년에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윤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이 높았으며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윤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 안에 숨긴 뒤,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윤 바오로는 북경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N. J. 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를 받고, 대전룸바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에게서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윤 바오로가 1790년 봄에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일 때문에 윤 바오로는 그해에 다시 한 번 북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 해, 조선 신자들과 한 약속에 따라 후안 도스 레메디오스(Juan 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렇게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 바로 그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이러한 노력은 한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고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 윤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지황 사바 (출처 : 가회동 성당 홈페이지) ‘지홍’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황 사바(池璜, Sabas)는 1767년에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 하느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1793년에,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얼마 안 있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지 사바의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뒷날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지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을 통해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났으며, 12월 24일(음력 12월 대전룸바 3일) 밤에,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 바오로와 함께 주 신부를 안내하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최인길 마티아 (출처 : 가회동 성당 홈페이지)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1765년에 태어난 최인길 마티아(崔仁吉, Matthias)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이냐시오(崔仁喆, Ignatius)는 그의 동생이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 베드로가 신앙을 전파하고자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최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서 1795년 초에 주 야고보 신부를 맞이한 최 마티아는,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야고보 신부는 최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나와 여회장인 강완숙 골룸바(姜完淑, Columba)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최 마티아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고자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 있어 최 마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주 신부의 행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최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인 윤 바오로와 지 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윤 바오로와 최 마티아와 지 사바는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윤 바오로와 지 사바와 최 마티아는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 바오로의 나이는 35세, 지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박해자들은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대전룸바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한편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숨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제의 모든 사목 활동을 도왔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을 여성 회장에 임명하였고, 강완숙은 노비에서 왕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류의 여성들을 만나 전교에 힘써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으니, 주문모 신부의 입국 당시 4,000여 명이었던 신자가 5년 만에 1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여성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강완숙과 함께 살면서 성물을 만드는 등의 노력으로 주문모 신부의 사목을 돕고, 또 기도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며 살고자 하였다. 윤유일의 4촌 동생인 윤점혜(아가다)는 온전한 신앙생활에 대한 염원으로 동정녀로 강완숙이 집에서 거주하며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주문모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돕다가 1801년 7월 4일 순교하셨다. 또 그녀의 동생 윤운혜(루치아)는 남편 정광수(바르나바)와 함께 신앙생활을 위하여 서울 벽동(가회동 근처)으로 이주하여 살며 집에 집회소를 마련하고, 상본과 성물을 만드는 등 주문모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돕다가 1801년 5월 14일 순교하셨다.가회동 성당 역사전시실 :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피신가회동성당 역사전시실 : 복녀 강완숙 골룸바와 첫 여성 공동체#주문모 신부를 #피신 시켜준 #복자 : #강완숙 골룸바복자 : 강완숙 골룸바 (가회동 성당 역사 전시실)강완숙 골룸바(姜完淑, Columba)는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지혜로움이 뛰어나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01년에 순교한 홍필주 필립보(洪弼周, Philippus)는 그녀의 아들이다. 장성한 뒤 덕산 지방에 살고 있던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간 강 골룸바는,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런 다음 이에 관한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녀는 “천주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고, 그 종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올바르니, 그 도리가 반드시 참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강 골룸바는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누구나 감탄할 정도가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또 대전룸바 그녀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인 홍 필립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온갖 노력을 다하였음에도 남편만은 입교시킬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신앙 때문에 남편에게 시달림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생활하였다. 어느 날, 강 골룸바는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에 그녀는 시어머니와 아들 홍 필립보와 의논한 뒤 함께 상경하였고, 이후로는 신자들과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Jacobus)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하였다. 이때 주 신부는 강 골룸바의 인품을 알아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자신의 집을 주 야고보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주 야고보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를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다. 윤점혜 아가타(尹占惠, Agatha)가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어 나간 곳도 강 골룸바의 집이었다. 강 골룸바는 지식과 재치를 겸비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을 권유하여 입교시킬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도 있었고, 과부, 머슴, 하녀도 있었다. 왕실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가 주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도 강 골룸바 덕택이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한결같이 “골룸바는 슬기롭게 모든 일을 권고하였으며, 열심인 남자 교우들도 기꺼이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따르는 것과 같았다.”고 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강 골룸바는 그동안의 활동들 때문에 곧바로 관청에 고발되었고, 4월 6일(음력 2월 24일) 집 안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강 골룸바에게서 주 야고보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은 형리들조차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3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강 골룸바는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는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7월 2일(음력 5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대전룸바 형조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이렇게 죄목을 붙였다. “강완숙은 천주교에 깊이 빠져 이를 널리 전파하였고, 6년 동안 주문모를 숨겨 주면서 남녀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불러들여 천주교에 물들게 하였다.” 이에 대해 강완숙 골룸바는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하였다. “이미 천주교를 배웠고 스스로 ‘죽으면 즐거운 세상(곧 천당)으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형벌을 받아 죽을지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고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강완숙 골룸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가회동 성당 관련 복자 10위 : 역사 전시실#가회동 성당 관련 #복자 #10위복자 주문모 (1752~1801)중국(中國) 소주(蘇州) 곤산(崑山) 출생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1795년 4월 5일에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 봉헌성사집행 외 교리서 간행, 교회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신유박해 때 서울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으로 순교복자 최인길 마티아 (1765~1795)서울 출생펑신도 지도자, 역관성직자 영입운동 주역, 주문모 신부의 거처 제공을묘박해 때 주문모 신부를 대신하여 체포되고 서울 포도청에서 장사(杖死)로 순교복자 강완숙 골룸바 (1761~1801)충청도 내포 출생초대 여성 회장 주문모 신부의 거처 제공다양한 부류의 여성들 전교에 탁월한 활약신유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斬首)로 순교복자 윤유일 바오로 (1760~1795)경기도 여주 출생평신도 지도자성직자 영입운동 주역을묘박해 때 서울 포도청에서 장사(杖死)로 순교복자 지황 사바 (1767~1795)서울 출생평신도 지도자 성직자 영입운동 주역을묘박해 때 서울 포도청에서 장사(杖死)로 순교복자 윤윤혜 루치아 (+1801)경기도 출생집회소 제공남편 정광수 바르바라와 함께 전교에 큰 역할을 함신유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斬首)로 순교복자 윤점혜 아가타 (+1801)경기도 출생동정녀 공동체 회장신유박해 때 경기도 양근 형장에서 참수(斬首)로 순교복자 정순매 바르바라 (1777~1801)경기도 여주 출생동정녀 공동체 일원교회서적과 성물을 신자들에게 보급신유박해 때 경기도 여주 형장에서 참수(斬首)로 순교복자 정광수 바르나바 (+1802)경기도 여주 출생교회서적 배포, 상본이나 묵주 제작, 제공신유박해 때 경기도 여주 형장에서 참수(斬首)로 순교복자 홍필주 필립보 (1774~1801)충청도 덕산 출생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斬首)로 순교가회동 성당 역사전시실 : 의친왕 부부의 세례사진설명 :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친왕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대전룸바 세례를 받아 그가 눈을 감기 1주일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였다. 의친왕은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조선사를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며 입교 동기를 밝혔다.그가 죽기 하루 전인 15일에는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천주실의, 황사영 백서, 주교요지, 석정 보름 우물(왼쪽 사진) 척사윤음, 기해일기(오른쪽 사진) : 역사 전시실#순교신앙의 #승리을묘박해(1795)로 시작하여 기묘박해(1879)까지 모두 황실에서 주도하였다. 황실에서는 옥쇄로 도장을 찍은 척사윤음을 전국에 배포하고 천주교를 씨를 말리려 했다. 그러나 뿌리째 뽑으려고 했던 그 천주교가 오히려 확산되고 신자들을 죽일수록 신자들은 살아나니 천주교가 바로 진리라는 것을 마지막 황실에서 시인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황실에서 세례 받았다는 것은 순교신앙의 승리를 입증한 것이다.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이 최종의 승리자이다. 우리의 신앙도 마지막에 승리할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천주교의 신앙인들이 어리석어보이고 패배자같이 보여도 결국 진리가 승리할 것이다.믿음의 무게만큼, 사랑의 깊이만큼 정성껏 쌓아 올린 성전우리 역사 속의 천주교는 단지 서구의 종교가 아니라 서학(西學)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인 새로운 정신이었다. 종교적 복음인 동시에 사회적 복음으로 사랑과 헌신, 평등한 사회를 실현케 했고, 신분제도와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웠다. 쇄국정책과 일제 치하를 거치면서 한국 천주교 역사의 중심에 가회동성당이 세워졌다.본당 건립과 부지 기증사진설명 : 전 마리아는 자신이 살고 있는 한옥집을 미사장소로 제공하다가 수양딸 배 수산나와 함께 집터 전체를 가회동성전 부지로 기증했다.영혼과 육신이 다 천주께서 주신 것이고, 이 집 역시 천주님의 것인데, 당신께서 당신의 것을 쓰시겠다니 기꺼이 내어드릴 뿐이다." – 전 마리아이 모든 일이 가회동성당관할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비록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한국교회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가회동 성당'은 민족의 화합과 영광 그리고 시련의 세월이 오롯이 녹아 있는 터에 세워진 '하느님의 집'이며 '축복의 성지'이다.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57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30-3) / 사진 : Hayemil출처 : 가회동 성당 홈피, 굿뉴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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